농민과 성소수자, 탄핵 정국이 쏘아올린 기묘한 조합
- lgbtnewskorea
- 7월 29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7월 30일
지난 12월, 윤석열로 인해 촉발된 민주주의의 위기 속에서 농민과 성소수자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새롭고 기묘한 연대의 조합을 만들어냈습니다.
원문 작성: 미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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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미겔(스페인어), Juyeon(영어), 우산(인도네시아어), 가리(일본어), 미겔(카탈루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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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와 농민?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와 ‘농민’은 접점을 찾기 쉬운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둘 모두 사회적 소수자로서 권리 쟁취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집단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사회적 소수자 간 연대의 움직임이 항상 있어 왔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두 집단이 함께 한다는 것은 이질적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12월, 윤석열로 인해 촉발된 민주주의의 위기 속에서 농민과 성소수자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새롭고 기묘한 연대의 조합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기반으로 집권한 윤석열에 맞서 성소수자와 농민이 연대하게 된 배경을, 지난 탄핵 정국 속 무수히 언급된 ‘남태령’에 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탄핵 정국 속 성소수자
우리는 이미 성소수자들이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 집회에서 끊임없이 목소리를 냈다는 사실을 다룬 바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 기간 중 제시한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문장으로 대표되는 윤석열의 여성혐오적 정치는 여성뿐만 아니라 장애인, 이주민, 농민, 성소수자 등 여러 사회적 소수자들의 권리를 축소하고 후퇴시켰습니다. 반인권적인 기치를 내걸고 집권한 이의 ‘비상계엄’ 앞에 수많은 사회적 소수자들이 광장으로 나선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합니다. 극우 이념의 전세계적인 득세 속에서, 반민주적인 ‘비상계엄’은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더욱 커다란 실존적인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상계엄’ 이후 성소수자들의 목소리에 관한 LGBT News Korea의 글 읽기: 군사반란 앞 인권과 민주주의 위기 속 성소수자의 목소리
그러한 점을 고려하더라도 윤석열 탄핵 집회에서 무지개 깃발과 같은 성소수자 상징물이 유독 많이 보였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합니다. 혹자는 지난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를 연관 짓고는 합니다. 박근혜 탄핵 집회 당시 성소수자들은 부패한 정치사회적 구습의 혁파를 기대했지만, 탄핵 이후 실상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문재인 정권에서 성소수자의 권리에 관한 정치적 의제는 답보 상태에 머물렀습니다. ‘정치적 대의’ 앞에 차별금지법과 같이 성소수자의 삶에 밀접한 의제들은 ‘나중’으로 밀렸습니다. 윤석열 정권 하 퇴보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9).
그렇기에 윤석열 퇴진 광장에서 보인 수많은 무지개 깃발은 “윤석열 정부에서 성소수자들이 경험한 억압과 배제에 대한 반작용이자, 그에 맞선 강력한 연대의 몸짓”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1). 성소수자 당사자들은 광장에 설치된 자유발언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었고, 윤석열의 소수자 혐오 행보에 맞서듯, 동료 시민으로서의 성소수자 포용을, 차별금지법과 혼인평등을, 다른 소수자 집단과의 연대를 호소했습니다.
탄핵 정국 속 농민
윤석열 하 농정(農政)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었던 것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입니다. 양곡관리법은 지난 1950년 제정된 법률로, 한국 정부는 이 법에 근거하여 주요 곡물 시장에 개입, 가격을 조정하고 있습니다. 그 중 쌀이 주요한 대상인데, 쌀은 대부분 한국인의 주식 곡물인 만큼 식량 안보 차원에서 ‘국가가 보호해야 할 작물’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부는 항상 쌀 재배를 장려해 왔고, 쌀값 안정 역시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하지만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풍작으로 인해 쌀 출하량이 증가할 때마다 쌀값 폭락으로 인해 오히려 농가 소득이 감소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현행 양곡관리법에 따르면 정부의 시장 개입이 선택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느 시점에 얼만큼 곡물을 매입해야 하는지도 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 다른 문제로는 농가의 쌀 재배 편향도 지적됩니다(2).
이에 2023년, 당시 야당이자 원내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쌀값 및 농가 소득 안정화, 식량 안보의 관점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습니다. 개정안은 ▲정부의 곡물 시장 개입을 재량에서 의무로 변경, ▲‘쌀 초과 생산량이 3∼5% 이상이거나 가격이 5∼8% 이상 떨어지면 과잉 생산된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수매해 쌀 가격을 안정화한다’라는 내용을 포함, ▲쌀 재배지에 다른 농작물을 재배하는 것을 지원 등을 골자로 합니다.
그러나 당시 여당인 국민의힘은 개정안의 무효용, 시장 원리 및 재정 문제 등을 이유로 반대했고, 윤석열은 이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임기 중 사용한 첫 거부권입니다. 윤석열이 국회에서 탄핵된 이후에 개정안이 국회를 다시 통과했지만 한덕수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은 또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아직 헌법재판소에서 윤석열 탄핵 심판이 남아있던 그때, 분노한 농민들은 트랙터를 이끌고 윤석열 탄핵과 거부권 규탄을 외치며 상경하게 되었습니다(3).
남태령에서 만난 농민과 성소수자
2024년 12월 21일, 트랙터를 끌고 전국을 출발해 서울로 올라오던 농민들은 남태령에서 경찰들에게 가로막혔습니다. 남태령은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에 위치한 지역으로,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입니다. 경찰은 남태령 전 차선을 통제하고 농민 시위대를 무력 진압하려 했습니다.
이에 수많은 소수자들이 농민들과 연대하기 위해 현장으로 몰려들었습니다. SNS를 통해 남태령의 상황이 퍼져나가자 “1~2시간 만에 수천 명 젊은이들이”, “국회 앞에서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며 흔들던 그 응원봉을 들고 2030 여성들이” 남태령으로 모였습니다. 정부청사와 대통령 관저 앞에서 탄핵 시위를 하던 이들이 소식을 접하고 남태령으로 모여든 것입니다(4).


수많은 성소수자들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윤석열 탄핵 집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발언과 깃발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마치 퀴어문화축제에서 행진하듯, 깃발을 들고 다른 소수자들과 함께 자리를 지켰고, 노래를 부르고 자유 공개발언을 이어갔습니다(5).
“막상 2030 여성들이 남태령으로 밀려들자 농민들이 느낀 놀라움과 벅참은 상상 이상이었다. [...] 주최 측은 [...]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이들은 모두 무대에 올라오게 했다. 발언 요청이 줄을 이었다. 동틀 무렵 발언을 신청한 이가 오후 3시가 되어서야 마이크를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남태령에서는 모두가 청중이자 발언자였다.
이들의 사연은 가지각색이었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겪은 차별과 소외의 경험을 털어놓았다는 점이다. 광주광역시 출신 한 여성은 볼펜을 입에 물고 서울 말씨를 익혔던 일을 이야기하며 울먹였고, 충남에서 온 여성 농민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농촌 문제에 냉소적인 시선을 보낸다고 말했다. 한 청년 농민은 스마트팜 위주 농업 정책을 비판했다.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한국에서 성장한 중국 국적의 청년도 무대에 올랐다. 밤새 남태령을 지킨 한 참가자는 “농민, 여성, 청년이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서로를 가르쳤다. 마치 28시간짜리 학교가 열린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출처: 시사인, (4))
이 연대의 물결 끝에 결국 경찰은 22일 오후 4시 차벽을 철수하고, 트랙터 30대 중 10대를 서울로 진입하도록 했습니다. 이 트랙터는 대통령 관저로 향해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트랙터 시위를 주도한 하원오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이를 “혐오와 차별 속에 주류사회에서 배제되어온 여성, 성소수자, 청소년, 노인, 도시빈민, 농민이 만든 승리”라고 평가했습니다(6).
퀴어문화축제에서 만난 성소수자와 농민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등 농민단체들은 지난 6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서울퀴어문화축제에 부스를 냈습니다. 대통령 관서 앞 탄핵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자유 발언에서 ‘농민들께서 퀴어문화축제에 오셨으면 좋겠다’라고 발언한 것에 대한 화답이었습니다(5).
다양한 농민단체들은 여러 부스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퀴즈를 통해 참가자들에게 농정 현안을 설명하기도 했고, ‘먹거리기본권’에 대한 설문조사도 진행했습니다. 참가자들에게 전국 각 지역에서 수확한 농산물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고, 농촌목회자인 차흥도 목사는 올해도 성소수자 커플들을 위한 축복 기도에 나섰습니다. 참가자들 역시, 탄핵 집회 당시 남태령의 시간을 기억하며 농민단체들의 참여를 환영하는 모습이었습니다(7).


마지막으로 정영이 전국여성농민회총연맹회장이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전한 연대 발언을 전하며 성소수자와 농민이 보여준 연대의 가치와 의미를 다시 한 번 상기해봅니다.
“농민은 여러분들처럼 늘 소수자였습니다. 농민들의 투쟁은 늘 외로웠습니다. 물가만 오르면 물가 상승의 주범이 농산물이고, 모든 무역 협정의 희생은 농산물이었듯이, 농민들의 투쟁은, 목소리는 언제나 묻혀버렸고, 항상 희생만을 강요받으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남태령에서는 달랐습니다. 농민들의 투쟁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 와 주셨습니다. 농민들의 투쟁에 조건 없는 연대를 보내주셨습니다. 1차 남태령에서도, 2차 남태령에서도, 윤석열이 파면되는 그 순간까지도, 농민들 곁에 소수자 친구들이 함께 해 주셨습니다.
주석: ‘1차 남태령’은 이 글에서 설명하였듯 2024년 12월 21일에 발생한 일을 가리킵니다. ‘2차 남태령’은 2025년 3월 25일 농민들이 윤석열 탄핵 선고 지연에 항의하며 다시 트랙터를 몰고 상경한 과정에서 경찰이 남태령 길목을 틀어막은 것을 가리킵니다.
농민들은 남태령에서 인종의 차이, 장애의 차이, 학벌의 차이, 부의 차이, 지역의 차이, 성의 차이를 뛰어넘는 평등한 세상을 이야기하며 경험하였습니다. 농민들도 그때 배웠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농촌은 그 어느 곳보다 가부장성이 강한 곳입니다. 그래서 농민 중에 여성 농민은 농사를 짓는 생산의 주체이지만, 아직도 법적·사회적 지위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30년 동안 농촌에서 살면서 차별·혐오·억압에 맞서고 평등을 외치며 살아왔지만 때로는 ‘이 정도밖에 바꾸지 못했을까’ 하는 그런 자괴감도 들고 많이 미안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늘 그래왔듯이 땅을 일구고 조직을 강화하는 활동을 계속할 것입니다. 여성 농민들은 남태령에서 촉발된 여성과 퀴어의 만남을 연대로 만들어내고 식량 주권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먹거리를 보장받을 권리가 있음을 실천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다양성이 있는 곳에 혁명이 있습니다. 농촌에서도 성소수자의 존재가 보장되어야 하며, 낙인과 차별이 없는 존재와 삶을 지켜내기 위해서 함께 투쟁해 나가겠습니다. 세상은 우리 같은 소수자들이, 차별받는 사람들이 바꿀 것입니다. 그렇게 차별받지 않는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데에 여성 농민들도, 농민들도 여러분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원문 작성: 미겔
원문 검토: -
번역: 미겔(스페인어), Juyeon(영어), 우산(인도네시아어), 가리(일본어), 미겔(카탈루냐어)
번역 검토: 희중(스페인어)
웹·SNS 게시: 미겔
카드뉴스 디자인: 가리
참고자료(한국어)
김세희. 2025년 1월 30일. 「탄핵 시위에 왜 이렇게 무지개 깃발이 많냐구요?」. 오마이뉴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99710
이오성. 2023년 4월 25일. 「양곡법 거부, 대통령이 사상 처음으로 농민을 걷어찼다」. 시사인.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146
2024년 12월 20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거부권 쓴 '양곡법 개정안'은 무엇?」. BBC 뉴스 코리아. https://www.bbc.com/korean/articles/cy4pj9w54nyo
이오성. 2025년 1월 6일. 「서로를 가르친 28시간, 남태령은 ‘학교’였다」. 시사인.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716
임은경. 2025년 6월 7일. 「“차별받는 소수자들이 세상을 바꿀 거예요”」. 프레시안.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5060412264045704
박주연. 2025년 1월 4일. 「‘남태령 대첩’ 이후, 여성과 소수자가 열어갈 세상」. 일다. https://www.ildaro.com/10085
강선일. 2025년 6월 19일. 「‘무지개 축제’ 초대받은 전봉준투쟁단, 성소수자 친구들과 재회」. 한국농정신문. https://www.ik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67553
명숙. 2024년 12월 24일. 「[명숙 칼럼] 남태령의 밤, 우리의 투쟁은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민중의소리. https://vop.co.kr/A00001665531.html
고은. 2024년 12월 26일. 「소수자 연대가 새로 쓴 역사, 남태령 대첩」. 주간영동. https://www.bluestars.kr/news/articleView.html?idxno=5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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